이번 4월24일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99주년 추모일이다.
로스엔젤레스 인근 특히 글렌데일을 중심으로 많이 거주하고있는 아르메니안들은 추모집회를 가졌고, 자녀들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회에 참여시킬 정도로 아주 중요하게 지킨다.
로스엔젤레스 거리를 행진하는 아르메니안들
약소민족의 설움
우리는 조국이 일제에 강점되고, 해방, 국토분단이라는 국가의 중요한 운명이 다른 국가들에 의해서 결정되고 그 결과로 오는 고통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지내왔다.
이처럼 국가의 운명이 다른 나라들에 의해 결정된 나라가 또 있다.
아르메니아 독립
아시아와 유럽을 경계짓는 코카서스 산맥 부근에 있는 나라들 중에 아르메니아 Armenia 가 있다.
옛 소련의 일부로 구성되어있다가, 소련의 붕괴로 1991년 Armenian Republic 으로 독립하였다.
인구 약 3백만명, 국토면적은 약 3만평방km로 경남과 경북을 합친 정도의 면적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어서 외국과의 물자교류에 어려움이 있고, 아르메니아 정부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본국에서의 어려움 때문에 국민들은 해외로 많이 이주하였는데, 해외에 살고있는 동포가 훨씬 더 많아서 약 8백만명 정도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역사
아르메니아는 오래전부터 독립된 나라였고, 한국의 고구려처럼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때도 있었다.
건국신화는 한국과 비슷하게 기원전 24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리적으로 그리스와 가까이 있어서, 일찍부터 발전된 그리스 문명을 접할수있었고, 5세기 초에 그리스문자를 본따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오랫동안 흥망을 거듭하다가 16세기에 들어 오토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1차대전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1828년에는 아르메니안(Armenian아르메니아 사람) 거주지역 일부가 러시아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아르메니안들은 오토만제국 영토와 러시아제국 영토에 나뉘어 살게되었는데, 여기서 그 비극의 씨가 싹트게 되었다.
대 학살
1914년부터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서 오토만제국과 러시아제국이 전투를 하게 되는데, 오토만 제국의 작전 정보가 러시아쪽으로 새어나간다고 판단한 오토만은 아르메니안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아르메니안들은 거주지역에 따라 오토만군과 러시아군 양쪽에 지원하여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만은 1915년4월24일 아르메니안 지식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계속 하여 1917년까지 체포 살해 추방이 계속 되었는데, 여기서 추방은 사막지역으로 내 몰아서 배고프고 목말라서 죽임을 뜻한다. 피해자의 숫자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연구단체별로 60만명 또는 백만명이상 이라고 발표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는 매년 4월24일을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념일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홍보하고, 그 배상을 요구하고있다.
아르메니아는 그 책임을 터키에게 묻고있으나, 터키는 이를 거부하고있다. 그 피해자들은 내전중의 서로의 피해자, 가난과 전염병의 피해자라고 하고, 또 오토만 제국과 현재의 터키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상 터키는 오토만의 후예이고 그 중심지역에 세워진 나라이다.)
현재 아르메니아와 터키간에는 외교관계가 없고 국경을 접하고있으면서도 통상이나 인적 왕래도 전연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독립의 희망과 좌절
1차대전이 끝나고 열강들 사이에서 아르메니아를 독립시켜주려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로 1920년8월10일 Sever조약에 의해서 아르메니아 독립안이 나왔다. 위치는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의 약 3배규모가 되게 서쪽 영토가 추가되고 흑해연안의 항구도 포함된 훌륭한 여건의 영토를 지정하였다. 그리고 수년간 미국의 신탁통치를 거쳐서 자주독립국가로 이어지는 독립안이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지지하는 안이어서 Wilsonian Armenia 라는 별칭도 붙었다.
아르메니안들은 환호하였고,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그러나 - - - 미국 의회는 이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였다.
1차 대전이 막 끝나서 전후 수습에 여유가 없는 상황에 또 젊은 군인들을 외국에 파견할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이 발을 빼자 신생 터키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였다. 자기네 영토를 일부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게 이유였다.
아르메니아는 전투력이 약하므로 할수없이 북쪽에 이웃한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도와서 터키와 싸우다가 1920년 12월 2일 종전 협정을 맺는데, 협정서에는 아르메니아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아르메니안들은 지금의 아르메니아 영토에 살게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러시아는 피를 많이 흘리기 보다는 터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대신 아르메니아를 수중에 넣겠다는 계산이었다.
그후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소련) 통치하에 들어갔다.
아르메니아도 지난 날에는 넓은 국토를 영유했었다.
교훈
아르메니아 역사를 보면서 국가 또는 민족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단결하지 않으면 언제고 주위 강대국들에게 이용당하거나 복종하게된다는 국제질서를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역사로부터 배운 교훈을 잘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간의 해난 사고를 교훈삼아 기본 원칙을 잘 교육시키고 꾸준히 지켜나가야 세월호참사같은 재난을 예방할수가 있는것이다.
나라의 안위와 국가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오직 개인의 정치생명에만 관심이 있는 한국의 정치꾼들 - 그들의 머리속에는 개인 욕심으로만 가득차있는것 처럼 보인다.
다시는 큰 참사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고, 주위 강대국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사회 기본질서를 잘 지키고, 국제 감각을 갖고 긴장하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진리를 잘 지키는게 가장 중요하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텔롭밸리 인디언 박물관2 Antelope Valley Indian Museum2 (0) | 2017.04.30 |
---|---|
안텔롭밸리 인디언 박물관 Antelope Valley Indian Museum (0) | 2017.04.19 |
Chechnya 체첸공화국 (0) | 2013.04.27 |
Dokdo, Korea's Beautiful Islnad 한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 (0) | 2012.10.15 |
정신대 징집 피하기 위해 딸을 빨리 시집보냈다. (0) | 2012.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