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미국서부 최초의 교회 San Diego Mission

조태오 2011. 10. 1. 01:11

 샌디에고 미션 (Mission San Diego de Alcala) 캘리포니아 미션시스팀 최초로 설립된 미션이며, 선교 시작점이기도하다.  복자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신부님에 의 1769 716 설립되었다.

이 미션 성당은 미국 서부 최초의 교회(신 구교 통틀어)로 설립되었다.

 

현재는 천주교 샌디에고 교구의 소교구성당으로 되어있고, 1976년 교황 바오로6세는 Basilica로 지정했다.

바실리카(Basilica)는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성당을 교황이 Basilica로 지정한다.

 캘리포니아 21곳 미션중에서 바실리카로 지정된 곳은 4곳이다. - San Francisco de Asis,  San Carlos Borromeo, San Diego, San Juan Capistrano

  

수천년 전부터 지역에는 원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1542 스페인 탐험가 Juan Rodriguez Cabrillo 스페인 명으로 배를 타고 지금의 샌디에고에 처음 상륙해서 San Miguel 이라고 이름 붙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그날짜 또는 가까운 날짜의 축일 성인 이름을 따서 지역이름을 정했다.

그로부터 60년후 1602년에 스페인 탐험가 Sebstian Viscaino  탐험선을 이끌고 샌디에고 만으로 상륙해서는, San Diego 라고 이름을 붙였다. 역시 가까운 축일 성인 이름을 붙인 것이다.

 

스페인은 새로운 땅을 먼저 발견해 스페인영토임을 선언하고, 220여년간 방치했다가,  1768 러시아시람들이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물개잡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식민지 건설에 나섰다.

 

스페인 칼로스3세는 뉴스페인( 멕시코지역) 명령하여 캘리포니아 지역에 원정대를 보내고 스페인 주권을 확립하라고 하였다.

  당시에 캘리포니아는 현재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와 멕시코의 바하캘리포니아를 통틀어 하는 말이었으므로,  멕시코 지역에 반도를 이루는 부분을 바하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 북쪽의 캘리포니아를 알타 캘리포니아(Alta or Upper California)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미 바하캘리포니아에 선교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알타 캘리포니아에도 같이 미션을 세우고 선교할것을 명했다.

 

프란치스코회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가 미션 설립 책임을 맡고, 미션팀을 보호할 군인들을 동행시키는데, 군인 책임자는 Gaspar de Portola 맡았다.

 

이들은 다섯 팀으로 나누어 샌디에고를 향하여  1769 뉴스페인을 출발하였다.

 

세 팀은 배로 갔는데, 1 San Carlos호가 출항하였고, 2월에는 San Antonio호가 출발하여 각각 4 샌디에고 만에 닻을 내렸다. 배들은 거친 파도와 싸우면 힘들게 항해를 했는데,  San Carlos호의 경우 두사람만 남고 다른 선원들은 모두 괴혈병이 돌아 숨졌다.

보급품을 실은 세번째 배 San Jose호는 도중에 실종되어버렸다.

 

두 팀은 산맥을 넘어 육지로 갔는데, 나귀와 말에 식량, 농기구, 씨앗 등을 싣고 갔는데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여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세라신부는 육지팀으로 마지막에 1769 629 도착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고, 키는 5피트2인치 몸무게 120파운드였다. 만성 다리염증이 있어 절뚝거리며 걸었다.

 

 

세라신부가 176973 작성한 편지에는 뉴스페인에서 219명이 출발했는데, 반이 조금 넘는 사람만 살아 도착했다고했다.

 

이런 우여곡절은 겪고 도착한 세라신부 일행은 샌디에고 만이 보이는 지점에 1769 716 미션을 설립하였다.

 

지점에서의 미션은 5년간 영위되었고, 물이 충분치 못하고 땅이 농사에 부적합하여 샌디에고 가까운 자리로 이동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최초로 행해진 세례식. 1769년7월22일, 프란치스코회 Gomez신부님.

 

 

 

하느님께 감사하는 세라 신부님

 

 

 

미션을 설립한후 8개월째에 동행한 군인들은, 보급품 부족때문에 힘들어서 더 이상 미션설립에 동참할수 없어 철수하겠다고 하자,

 

 세라신부님은 9일만 더 기다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런데 그 안에 보급품을 실은 배 San Antonio호가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세라신부님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있다.

 

 

 

 

 

 

 

 

 

 

미션 주위의 땅은 경작하기에 척박하고 물이 항상 풍부하지도 않아 어려움이 많았으나, 서서히 생산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5마일 떨어진곳에 댐을 건설하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다.

1797년은 풍족한 해로 원주민 565명이 영세하였고, 5만에이커의 땅에서 옥수수, , 보리, 강낭콩, 병아리콩 생산되었으며, 포도밭에서는 포도주 만들기에 충분한 포도가 수확되었고, 채소밭도 가꾸어졌다.

미션에는 2만마리, 만마리, 1250마리 등도 길러지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할당시, 가축도 없었고 덤불만 자라던 건조한 땅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원주민들은 농사방식도 알게되었다.

 

 

 

1800년에는 미션과 더불어 생화하는 원주민이 1500명이나 되었고, 1803년 지진피해를 겪고나서 건물을 더 지었는데, 1813년에 거의 현재규모의 건물이 지어졌다.

 

 

LA에서 가려면-  5번 프리웨이 남쪽으로 110마일 가서, 805번 프리웨이로 바꿔타고 남쪽으로 10마일 가서, 8번 East로 1마일 가서,  Faimont Ave North로 내려 죄회전 1마일쯤 가서,  San Diego Mission Rd에서 좌회전 해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입간판이 보인다.  

 

이 간판이 보이자마자 오른쪽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토요일인데 거의 비다시피 한가했다.

 

주차시켜놓고 오른쪽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묵상정원으로 들어가는 아치게이트가 이색적이었다.

 

묵상정원에는 미션 설립자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님 동상이 서 있다.

발이 불편한 관계로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다.

 

세라신부님은 캘리포니아 미션의 총 책임자였으므로 순회 지도하다가, 이 미션에 돌아왔을때 사용했던 방이다.

 

정원 한쪽에 있는 원주민 주거용 집 Ewaa. 선교사들이 왔을 당시에 지어 살았던 형태로, 버드나무가지를 엮어서 틀을 만들고, 제일 나중엔 갈대잎 같은걸로 마무리했다. 두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의 보호처가 되었다.

 

곡식이나 열매를 빻는데 사용했던 절구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