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29일 L.A.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사건은 이곳 한인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힌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4.29폭동 또는 L.A.Riot라고 하는 이 폭동으로 55명이 숨졌고, 부상 2383명, 검거 18,000명, 재산피해 8억달러 규모였다.
그중 한인 피해는 사망1명, 부상46명, 업소 2300개소가 약탈 또는 불타버렸고, 금액으로는 4억달러정도로 추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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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의 원인 -
1991년3월3일 마약을 한 흑인(로드니 킹)이 고속도로에서 경찰의 추적을 받으며 추격전을 하다가 시내 도로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춰서고, 경찰로부터 엎드리라는 명령에 불응하고 오히려 경찰에게 대들다가 4명의 경찰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고서야 제압당했다.
이 정도의 일은 가끔 있는 일인데, 그 동내의 한 주민이 이 광경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해서 방송국에 제보한데서 문제는 확산되기 시작했다.
방송국에서는 좋은 소재꺼리가 생겼다고 반복방송했고, 이 사건에 참여했던 4명의 백인경찰은 기소되었다.
재판이 길게 진행되다가 다음해인 1992년4월29일 판결이 내려졌는데, 경찰 4명중 3명은 무죄, 1명만 경범죄로 판결났다.
이 뉴스를 접한 흑인들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며 분노했고, 경제불황으로 인한 빈곤상태의 흑인들이 울분을 참지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흑인거주지역인 사우스센트럴 지역에서 오후5시부터 약탈 방화가 시작되면서 폭동의 시작되었다.
구타장면의 반복 방송 -
방송국에서는 4명의 백인경찰이 한 흑인을 구타하는 장면만 계속 반복 방송을 했기 때문에 그걸 보느라면 누구나 세뇌되어 백인 경찰들이 너무했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경찰이 왜 그렇게 해야했을까?
경찰이 검문을 위해 차를 세우면 경찰의 지시하는대로만 하면,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면허증 보이고, 티켓 한 장 받으면 끝난다. 그 티켓 내용에 불만이 있으면 법원에 가서 설명하면 된다.
그 흑인 로드니 킹은 경찰의 지시를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마약을 한 상태에서 차를 세우라고 해도 세우지 않고 계속 차를 몰아 추격전을 벌였고, 차에서 내려서는 엎드리라고 해도 엎드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경찰에게 달려들었고.. 그러니 경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쓸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재판 과정은 어떻했을까?
일반 국민들은 TV를 통해 4명의 경찰이 로드니 킹을 구타하는 장면만 보고 또 보고 머릿속에 새겨졌다.
배심원들에게는 구타장면 외에, 로드니킹이 경찰에 대드는 장면이 재판과정에 증거로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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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국민들이 기억하는 자료와 배심원들이 보는 증거 자료가 다르게 되었고, 그 결과 국민이 기대하는 결과와 배심원이 내린 결과가 다를수밖에 없었다.
이 책임은 다분히, 보도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은 방송국에 있는게 아닌가? 시청률 올리기에만 급급해서, 사회적 파장은 뒷전이었다.
왜 한인들 피해가 가장 컸는가?
- 흑인 주거지역에서 장사를 많이 했고, 흑인 거주지역과 백인거주지역 사이에 한인타운이 위치했기 때문이다.
왜 흑인 지역에서 많이들 장사했는가?
- 1965년 흑인거주 지역에서 왓츠폭동 Watts Roits 이 발생했는데, 그 때는 유태인들이 그 지역에서 장사를 하다가, 폭동으로 혼이 나서 차츰 철수를 했다.
돈을 벌수있다면 뭐든 다 하는 유태인들이 장사를 못할 지역에서 장사를 할수있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 - 곧 한국인이다.
유태인이 철수한 지역에 한인들이 들어가 장사를 한 것이다.
미국 경찰은 왜 막지 못했나?
여기 경찰은 폭동사태를 확실히 막을수있다는 확신이 없어, 선뜻 못 나선것 같다. 그래서 한인들에게 무조건 철수하라고만 했다.
한인들은 어떻게 대응했나?
처음에는 철수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일구어놓은 재산이고 업소인데... 막대기와 총을 들고 방어에 나섰다. 그결과 어느정도 약탈과 방화를 막아낼수 있었다. 미국법으로 자기업소를 지키기 위해서는 총을 들고 있어도 된다고한다.
가게 옥상에서 총을 들고 지키는 한인들 - 우리측과 폭동자들을 구별하기위해 흰 머리띠를 둘렀다.
평정은 ?
- 폭동 3일째인 5월1일 주방위군이 투입 배치되면서 폭동이 평정되었다.
폭동의 결과 -
한인들에게 폭동은 많은 피해를 주었고, 교훈을 남겼다.
1. 정치력 부재 - 시청, 경찰간부 등에게 전화를 걸어 폭동을 적극 막아달라고 할 한인 정치력이 약했다.
2. 평소의 이웃인 타인종과의 관계 증진 - 인종간 보이지않은 적대감 안 생기도록.
3. 자기 방어력 확보. - 경찰은 나중에 상황이 끝난뒤에 왔다.
4. 한인들의 사회 공헌 - 대외 이미지를 좋게 해야 도움을 받기가 수월하다.
5. 경찰직 등 공무원을 많이 배출해야.
한인들의 현재 대처 노력 -
1. 정치력 - 선출직 공무원 등에 많이 진출하고있다. 아직 투표율이 낮은 상황이다. 투표율 높이는게 급선무인데...
2. 타인종과는 많이 협조하는 노력을 하고있다.
3. 자기 방어력 - 해병전우회가 구성되어 있지만 공식적으로 활동하진 못한다.
4. 한인들이 기부도 많이하고 노력하고있다.
5. 한인 경찰이 81년 6명에서 지금은 200명이 넘는다.
4.29폭동이 일어난지 20주년이 되는 이때, 당시에 L.A.에 살지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듣고 읽은 내용을 느낀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비싼 대가를 치른 4.29폭동 L.A.Riot 가 미국역사의 일부이면서 한민족이 관련된 역사이기에, 이걸 잊지 않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비슷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개개인 생활도 중요하지만 단체참여, 친절, 단결, 봉사, 투표 등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살아가면서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한인들에게 누가 되지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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