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바사 박물관

조태오 2024. 10. 6. 07:36

바사 박물관(Vasa Museum)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해양박물관으로,

16288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호가 전시된 곳이다.

침몰된 바사호는 1956년에 발견되어, 1961년에 스톡홀름 항구에서 인양되었다.

박물관 정면 

항구에서 바라본 바사박물관

전망대에서 본 바사박물관 

한글로 된 안내팜플렛

바사호 선체 - 너무 커서 한눈에 안 들어온다.

17세기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제국 건설에 집중하고 있던 시기라 막강한 해군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전함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바사호는 길이 69m, 탑승 가능 인원 450, 탑재 대포 수량 64개에 이르는 거대한 배로 제작되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국왕은 해군력 강화 정책을 펼치면서 군함 건조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에 바사 호의 설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구스타브는 함명을 자신의 왕조 이름을 따서 바사(Vasa)라고 지었다.

바사호 제원 : 배수량 1210, 길이69m, 11.7m, 높이 52.2m, 흘수선 4.75m

인원: 승조원 145, 전투원 300

함포는 24파운드포 48, 3파운드 8, 1파운드 2, 그외 대포 6

 

배의 전면에는 구스타브 아돌프를 상징하는 황금 사자상을 새겨놓았으며, 선체에는 황금으로 도금한 영웅과 병사 조각상이 천여 개나 새겨진 아주 호화로운 배였다.

침몰

1628810, 스톡홀름 항구에서 수많은 인파들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첫 항해에 나섰다.

바사 호는 엄청난 환호와 함께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가 연안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첫 항해를 구경하러 온 이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는 듯 한쪽 현의 함포를 일제사격을 하는 장관을 보여줬다.

그런데 갑작스런 돌풍과 대포의 반동이 합쳐져 배가 좌현으로 기울더니 전복되어 침몰했다. 그것도 출항한 지 30분 만에 수천여명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승선원 150명중에 30여명이 익사하고 말았다.

배가 너무커서 한눈에 안 들어오므로, 10분의1크기 모형배를 만들었다.

이 작은 모형배를 만드는데도 5년이 걸렸다고 하던데 실제 바사호 제작에는 3년이 걸렸다고 한다.

바사호 인양 모형

 

바사호 밑으로 밧줄을 걸어 끌어올리고있다.

바사호 내부 모형도 

보이는 부분만도 6층이다.

사관실 

함포 위치

그당시 수중에서 작업하기위한 장치.

이 장치로 수중 30m까지 내려가 작업했다고..

 그당시 조선소 전경 

목수 공구 

침몰 이유

1. 무게중심 - 바사 호는 당시의 선박 제조술이 총동원된 걸작품이었다. 선체 자체는 잘 만들어졌으나, 장식물도 너무 많았고, 대포를 너무 많이 탑재했다. 구스타브 아돌프 2세가 갑작스럽게 용골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설계가 수정되었다. 이 때문에 무게중심이 높아져 버렸다.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릴 때 선체가 쉽게 기울어지게 된 것이다.

2. 비대칭 - 좌현과 우현을 각각 스웨덴 작업자와 네덜란드 작업자가 나눠서 건조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제적으로 통일된 도량형이 없어서, 양국 작업자가 서로 다른 도량형에 맞춰 작업한 결과로 인해 선박의 모양이 비대칭이 되었고 더욱 침몰하기 쉬운 조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3. 대포 - 32문을 장착할 때 처음에는 12파운드짜리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국왕은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갑판마저도 24파운드 대포로 무장하라고 명령했다. 상대적으로 협소한 상갑판에 무거운 대포가 가득차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갔다.

4 하단 포문 위치가 수면상 불과 1.2미터 높이에 있었으므로 침수의 위험이 있었다.

 

결론은 이 배의 설계에 간섭을 한 국왕 구스타브 2세의 잘못이 제일 컸다고 하겠다.

아무리 위대한 군주라도 전문분야에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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