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선을 치르면서 박정희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는 표현들이 자주 나왔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시절 학생이었고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1년이 멀다하고 경제가 발전하고 변화는게 실감났으나,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박대통령이 독재자라는 의식을 못하고 지나왔다.
사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한 지식은 거의 없고, 막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 며칠사이에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 (부제: 62년 생애의 62개 장면- 2009년 조갑제 지음) 이란 책을 읽었다.
8백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읽고 알고싶은 몇가지를 정리하여보았다.
1. 5.16혁명의 배경
2. 경제개발5개년 계획
3. 박정희 - 대통령 취임
4. 경제 개발
5. 유신선포 이유
6. 경제개발 성과
1. 5.16혁명의 배경.
1960년 4.19학생혁명으로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한 후, 온 나라에는 데모열풍이 번졌다.
맨주먹으로 일으킨 데모에 대통령이 물러나니, 데모로 안될것이 없는것처럼 생각한 학생들은 연일 각종 데모를 일으켰다.
대학생들만 아니고 고등학생 중학생까지 온갖 이유로 데모에 나서서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심지어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국회 본회의장 단상까지 점령하고, 맨주먹으로 휴전선을 돌파하여 북한까지 해방시키겠다고 큰소리치기도 하였다.
장면총리 정부는 제 기능을 할수가 없었고, 국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군대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작심하고 내려오는 날에는 꼼짝없이 당할수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럴때 군이라도 나서주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 군 고급 장교들은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하기도 했다.
박정희 육군소장은 이런 사회혼란이 계속되면 안될것이라고 작심하고, 사전에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고, 1961년5월16일 새벽에 군을 이끌고 혁명에 나섰다.
참모총장은 그들을 막으라고 병력을 배치했으나, 이를 돌파하고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접수하여 혁명공약을 방송하기에 이른다.
정부관료들도 예상했던 올것이 왔구나 했고, 서울시민 과반수가 혁명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2. 경제개발 5개년계획
그 당시 한국은 국민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도, 식량이 부족하여 봄에는 굶주리는 상황으로 춘궁기, 보릿고개라는 용어도 있었고, 전기가 모자라 제한 송전으로 마음대로 전등도 못켜고, 지방에서는 석유 등잔으로 불을 밝혀야하는데, 석유가 아까워 이웃집에 가서 공부하고 오는 경우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권을 이어받은 박정희 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낙후한 경제를 일으키려고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3. 대통령 출마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그동안의 경제를 일으키려 추진하던 계획을 완성하려면 자신이 계속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에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결심하고, 군복을 벗게된다.
민간인 신분의 박정희 대통령후보는 1963년 10월15일 대통령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윤보선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4. 경제 개발
한국은 국토는 좁은데 인구는 많아 식량이 모자라고,
석유등 지하자원도 빈약해서 경제를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 수출을 해야 외화를 벌어 석유와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것이다.
- 수출하려면 공장을 세워야하는데, 공장을 세우려면 전기와 외화가 필요했다.
- 필요한 전기를 위해 발전소를 세워야하는 데, 외화가 있어야 한다.
- 외화를 얻기위해서는 수출을 해야하는데....
다 얽혀서 어디서 시작을 해야할지... 이전 지도자들도 이래서 못한 것이다.
어쨌거나 수출을 해야했다. 가발같은 가내공업, 수공업을 시작했고, 농수산물등 최대한 활용해서 수출을 해야했다.
서독으로부터의 차관, 한일관계 정상화, 월남 파병 등으로 외화를 조달하며 발전소와 공장을 지어갔다.
한편으로는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농촌을 발전시켜갔다.
5. 유신 선포
경부고속도로 공사때, 김대중 김영삼 등을 비롯한 야당인사들의 극심한 반대로 어려움이 있었고, 다른 국가 기간산업을 시행하는데도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아 추진이 어려웠다.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드러누운 야당 인사들
1972년10월17일,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한국실정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가
1. 남북대화에 대비한 한국의 체제정비 필요성,
2. 파쟁을 일삼는 정당과 국회에 대한 불신,
3. 미국과 중공의 접근 등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에 대응,
4.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로 경제를 일으켜나가기 위해서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배고픔을 해결하는것이 더 시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중요한 사안이므로 국민투표에 붙여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것이 유신이다.
이어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10월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이란 캐치프레즈를 내걸고 추진했다.
1981년 달성할 목표를 4년앞서 1977년에 100억불 수출, 1인당 개인소득 1000불을 달성하였다. 이때 정부와 국민이 다 기뻐했고, 본격적인 경제성장의 바탕이 이루졌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의 경제가 마치, 항공기가 활주로를 막 이륙한 상황으로 조금만 더 추진하면 일정고도에 올라 순항할수있다는 형국이었다.
6. 경제개발 성과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역점적으로 추진했던 수출은 62년도 5천만불에서 79년도 150억불을 수출했으니 300배 발전한 것이다.
국민소득(1인당GDP)도 1961년도 82불에서 1979년도 1676달러로 20배 성장했다.
1962년도 1인당GDP는 북한보다 훨씬 낮았으나, 1979년엔 두배이상으로 앞섰다.
필립핀과의 비교 : 1966년 1인당 GNP – 한국 131달러, 필립핀 269달러였으나,
1979년에는 한국 1676달러, 필립핀 671달러로 크게 역전되었다.
어떤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발전할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한국에는 산업의 기초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여간한 추진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잠시 서구식 민주주의를 멈춘 유신체제여서 가능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누군가 이렇게 쓴걸 읽은 적이 있다.- 박정희는 3만명을 못살게 굴었으나, 3천만명을 잘살게 만들었다.
야당정치인이나 언론인 등 3만명에게는 독재자였으나, 3천만 국민에게는 산업화를 이룬 대통령이었다.
다른 대통령들은 국민생활보다는 3만명의 여론 주도층에 더 신경을 쓴것 같다.
어느 대통령이 더 편하고, 어느 대통령이 더 애국자일까?
박정희는,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수 없다.” 는 속담을 극복한 대통령이다.
박정희는 지금까지 재직한 10명의 대통령들(이,윤,박,최,전,노,김,김,노,이)중 가장 국민을 사랑한 애국자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가난한 한국을 산업화로 이끈 훌륭한 독재 대통령이라고 생각되었다.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고궁1 – 경복궁 (0) | 2015.02.28 |
---|---|
남북한 1인당 국민소득 비교 (0) | 2013.01.03 |
인천 자유공원 (0) | 2012.07.14 |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Park Chunghee Presidential Museum (0) | 2012.07.09 |
세종이야기 Story of King Sejong (0) | 2012.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