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울의 고궁4 - 덕수궁

조태오 2015. 3. 8. 06:34

  덕수궁은 조선 궁궐로서, 사적124호이며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조선 초기 세조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 가엽게 여겨 개인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임진왜란 뒤 선조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그해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623년에는 인조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1907(순종 1) 순종 즉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1907년에는 대한제국 황궁이었다.


대한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이었다.

 1904 화재로 1906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문 앞에서  왕궁수문장 교대식이 치러지고있다.

 

금천교

정릉동천의 지류인 덕수궁 금천 흐름을 약간 바꾸어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중화문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회랑이 양쪽으로 연결되어있었으나 일제강점기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이 있었다.


중화전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이고,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중화전 내부 -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여있다.

천정에는 용 두마리가 조각되어있다.


석어당

석어당은 덕수궁에 지어진 건물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이다.

1904년 화재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1593) 창건했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살았다.

석어당은 정면 8,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즉조당

즉조당은 정면 7,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덕수궁의 침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사용하였다.

1623 반정으로 인조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1902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함녕전

함녕전은 광무 1년(1897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보물 820호로 지정되었다.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했다.


덕홍전

덕홍전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정관헌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정관헌 내부


광명문

광명문 원래 함녕전의 정문이었는데, 1938년에 이곳으로 이설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흥천사 범종, 자격루의 일부, 화차가 전시되어 있다.


신기전 화차 - 화약을 이용하여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한다.


자격루(물시계) - 국보 제229호, 세종 만들어진 것을 중종 29년(1536년) 보완한 것이다.


흥천사 범종 - 1462년에 제조되었고, 보물 1460호로 지정되었다.


석조전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 장대한 3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 시절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 설계했다. 1900년-1909년 사이에 지어졌고, 그리스 건축을 조형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이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는데, 1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1층에는 대한제국 역사관이 자리잡고 있어 관람했다.

대한제국 시절 여권

대한제국시절 미터법이 도입되었다.

토지 측량과 등록이 1900년 이전에 시작되었다.

토지등록이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았으나, 그 전에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새로 배웠다.


덕수궁 주변 지도




대한제국 시절 초등학교 교과서


대한제국 우표 -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표기되어있다.


 덕수궁은 일제 강점기에 그 규모가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많은 전각들이 헐렸다.

1904년 대화재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목조건물인 까닭에..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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